? 금주요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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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넘어지는 믿음이 있고 넘어서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개역) “침륜에 빠지는 믿음”은 어떤 고난이나 유혹 앞에서 넘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은 그것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대단한 믿음을 가진 듯했으나 그들은 며칠 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무리들로 돌변했습니다. 넘어지는 믿음입니다. 왜 이들의 믿음은 넘어지는 믿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에베소에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28절과 32절, 34절에 세 번의 큰 외침이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에베소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넘어지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를 보게 됩니다.

첫째, 가식적인 믿음입니다.(23-2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장사하던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바울의 전도로 수입이 줄어들자 동일직종에 속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데메드리오의 말을 듣고는 분노가 가득하여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이는 그들이 섬기는 신 아데미를 향한 대단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데미 신상을 매매하여 버는 돈을 향한 믿음입니다. 가식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반드시 고난과 유혹 앞에서 넘어집니다.

둘째, 맹목적인 믿음입니다.(29-32)

이 일로 온 시내가 요란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했습니다. 그 무장이 모두 여섯 가지인데 그 중 셋이 말씀과 관련된 것입니다. 진리로 허리띠그들은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절) 연극장 안에 모인 사람의 절반은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부화뇌동하여 모인 사람들입니다. 맹목적(盲目的)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 역시 넘어지는 믿음입니다.

셋째, 착각하는 믿음입니다.(33-41)

모인 무리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두 시간이나 외쳤습니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에베소 시의 서기장은 에베소가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저들의 에베소 시민 된 자부심을 부추기며 달래서 모임을 해산시켰습니다. 오늘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내가 대 광성교회의 교인이다, 내가 목사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마치 내가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착각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 역시 고난과 유혹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넘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넘어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그것은 건강한 목적, 분명한 목적을 가진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 가겠다 말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제국의 심장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계획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적은 토끼나 거북이를 이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큰 성 바벨론을 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가식적인 믿음, 맹목적인 믿음, 착각하는 믿음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넘어서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있는 고난과 유혹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넘어서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