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요약설교

Home > 예배로의 초대 > 금주요약설교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바울을 불러내어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道)를 들었다 기록합니다. 벨릭스의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복음에 관심이 있는 양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道”, 곧 “신앙의 길”을 물은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하여 강론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믿는 바른 신앙의 길을 봅니다.

Ⅰ. “심판”으로 출발하는 길이 아닙니다.

심판으로 출발하는 신앙의 길은 도피적 차원으로서의 신앙생활입니다.

심판이 두려워,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취했던 방법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자 요한은 절제를 일러주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심판의 두려움이 절제하게 합니다. 그 절제가 우리를 조금은 의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길에는 자유함도 기쁨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 4:18, 공동번역)

Ⅱ. “절제”로 출발하는 길이 아닙니다.

절제로 출발하는 신앙의 길은 도덕적 차원의 신앙생활에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윤리 이상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이신론(理神論)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주의 근원이 되는 어떠한 원리나 이치, 기(氣), 에너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반면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을 신뢰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절제, 금욕, 자기 수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까?” 생각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존경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교제는 없습니다. 절제를 통하여 의에 이르고 심판도 면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 의입니다. 유교적인, 철학적인 신앙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Ⅲ. “의(義)”로 출발하는 길입니다.

한자로 의(義)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羊) 아래에 내(我)가 있는 형상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은 나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죽음을 가져왔음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내주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의 죄값을 치러주셨음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내 안에 여전히 죄의 소원이 남아있건만 하나님은 나를 죄있다 하지 않고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 은혜가 나로 죄를 다스리며 죄를 이기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義)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친밀한 사귐입니다.(롬 1:17, 공동번역) 여기에 신앙의 기쁨과 생명이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어려움을 만나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합니다. 건강한 신앙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