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주요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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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나그네”(벧전 2:11)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일했다면 바울은 “너희 기쁨을 돕는 자”(고후 1:24)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헌신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쉰에르고스”(동역자)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기쁨을 위하여 수고하는 쉰에르고스”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시너지”(synergy)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광풍을 지나는 바울에게 아리스다고를 붙여주셨습니다.

Ⅰ. 고난을 함께하는 동역자

성경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말씀하셨습니다.

함께할 때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반감됩니다. 좋을 때 같이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같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 중입니다. 그 과정에 역풍과 광풍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때, 그의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절에 그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있었으니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이었다는 것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을 때 따랐던 모든 고난을 감수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후 그는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결박, 이후 가이샤라에서 2년간의 옥고, 지금 로마행 호송에도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4:10절에 의하면,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힌 자로 있었습니다. 바울을 돕기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고난을 함께하는 동역자가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Ⅱ. 묵묵히 함께하는 동역자

욥의 세 친구가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욥은 그들을 두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욥 16:2) 그들의 위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욥을 더욱 고통케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말 때문입니다. 그들은 네가 이 재앙을 만난 것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거야, 어서 회개하라며 욥을 다그쳤습니다. 고통을 공감해주기보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답을 주려고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묵묵히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아리스다고는 성경에 다섯 번 언급됩니다.(행19:29, 20:4, 27:2; 골 4:10, 몬 1:24) 그런데 아리스다고는 말이 없습니다. 중요성이 없어 기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바울이 가장 힘들어할 상황에 늘 곁에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말없이 함께하는 동역자였습니다.

묵묵히 함께하는 동역자가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Ⅲ. 끝까지 함께하는 동역자

오늘 본문에는 바울과 함께한 또 한 사람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진 누가입니다. 본문 1절에 “우리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누가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바울 일행을 언급할 때 썼던 말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10절입니다. 2차 전도여행 중 드로아의 환상을 분별할 때부터 누가는 바울 전도여행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는 여정에 함께합니다. 이후 바울이 로마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도 아리스다고와 함께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골 4:10,14; 몬 1:24) 또한 훗날 바울이 붙잡혀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누가는 함께했습니다.(딤후 4:11) 아리스다고나 누가나 끝까지 함께하는 쉰에르고스였습니다. 이들은 다 이름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묵묵히 섬기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알아줍니다. 하나님도 기억하여 그 이름을 드러내 높이십니다.

고난 중에도 변함없이 묵묵히 끝까지 함께하는 동역자가 정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