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따뜻한 소그룹
사무엘하 17:24-29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대비되는 소그룹을 봅니다. 한쪽은 압살롬과 함께 한 아히도벨과 아마사의 소그룹입니다. 다른 한쪽은 다윗과 함께한, 그러나 예루살렘에 남겨 둔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의 소그룹, 그리고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은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의 소그룹입니다. 후자의 두 소그룹이 압살롬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합니다. 어떻게?
1. 분별하는 소그룹 (24-26)
예루살렘을 재건한다 함은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분별입니다. 그러나 홀로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소그룹을 이루어 함께 분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항상은 아닙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과 아마사가 그 예를 보여줍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붙어 다윗을 죽이려 했을까요? 그는 간음자요 살인자인 다윗을 향해 정의의 칼을 든 사람으로 말해지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정의를 가장한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자기가 어떤 지혜를 내놓았을 때 좋다, 고맙다 하면서도 늘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겠다 하는 다윗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 붙었는데, 후새로 말미암아 자기 모략이 꺾이자 스스로 목을 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습니다. 반면 후새나 바르실래의 그룹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과 함께 은혜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을 위하는 일에 함께한 것입니다.
2. 극복하는 소그룹 (27- )
다윗과 함께한 두 번째 소그룹이 있습니다. “다윗이 마하나님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27절) 이들 세 사람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유대 광야에 내몰린 다윗을 찾아오기까지는 극복한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을 극복합니다. 지금은 압살롬의 시대입니다. 다윗은 지는 해요, 압살롬은 뜨는 해입니다. 줄을 선다면 압살롬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왔다는 것은 생사를 건 일입니다. 만일 압살롬에 의해 다윗이 진압된다면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반대를 극복합니다.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길이기에 무릅쓰고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셋째, 거리를 극복합니다. 이들은 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랍바와 로데발, 로글림에서 찾아왔습니다. 랍바는 이방 나라입니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주일을 지키기 위해 청주, 일산, 인천, 익산 등지에서 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고마운 분들입니다.
3. 섬기는 소그룹 (28-29)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는 소그룹이 되려면 끼리끼리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닫힌 모임이어서는 안 되고 열린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 조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새로운 가족을 들이며 분가(分家)를 꿈꾸는 소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좋은, 친교만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되면 교회 안에 암적인 존재가 됩니다. 소그룹을 통해 온 나라와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전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자기를 섬기는 모임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복음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섬김은 순종입니다. 후새와 사독은 다윗이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할 일이 있을 것이라 한 다윗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둘째, 섬김은 드림입니다. 남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각종 생활용품과 먹을 것을 챙겨왔습니다. 셋째, 섬김은 마음입니다.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29절) 훗날 무엇을 기대하며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따뜻한 섬김은 해같이 빛납니다.
댓글